1648년(인조 26년) 1월 29일, 당시 왕세자였던 봉림대군(효종)과 세자빈 장씨(인선왕후)의 여섯째 딸로 태어났다.
1659년(효종 10년) 3월, 우의정 원두표(元斗杓)의 손자이자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 원만리(元萬里)의 아들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鱗)과 혼인을 약속하였다. 같은해 5월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상을 마치고, 1661년(현종 2년) 가례를 올렸다.
공주 시절
1664년(현종 5년), 현종은 도방군(到防軍)을 숙경공주의 저택을 짓는데에 보내어 부역을 시켰는데 승지 이원정(李元禎)이 법에 어긋난다며 사역을 중지시킬것을 청하였으나 현종은 이를 묵살하였다.[1] 이후에도 숙경공주의 저택 공사와 관련하여 간원이 중지할 것을 청하였다.
숙경공주의 저택 터를 여염집이 즐비한 곳에다 잡아
철거된 인가가 30여 호(戶)에 이른다는 이유로 연달아 아뢰고 힘써 쟁론하였으나,
상(현종)이 따르지 않았다. — 《현종실록》 18권, 현종 11년(1670년 청 강희(康熙) 9년) 8월 19일 (계묘)
사망
1671년(현종 12년) 1월 9일, 숙경공주는 입궁하여 왕과 대비를 알현하려다가 갑작스럽게 천연두를 앓아 집으로 되돌아갔다. 공주의 생명이 위독해지자 현종은 공주의 시아버지인 원만리를 불러 병구완을 하게 하였으나 곧 죽었다.[2]
숙경공주의 상에 현종이 백관과 함께 숭문당에서 곡을 하였다. 당시 현종의 건강이 좋지 않아 약방에서 만류하였지만 현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3]
석물로는 묘비 1기, 상석,향로석 각 1기, 망주석,문인석 각 1쌍 및 계체석 등이 있다. 봉분은 원형의 호석을 두르고 있고 봉분 주위에는 곡장(曲墻)이 설치되어 있다. 묘역에 이르는 입구에는 신도비가 1기 세워져 있다. 묘역 좌우에는 망주석과 그 앞쪽으로 문인석이 각각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망주석은 폭이 159cm의 규모로 좌우측 모두 올라가는 형태의 쥐모양이 양각되어 있다.
문인석의 형태는 양관조복에 홀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조복 앞면에는 홀을 든 손등으로부터 포(袍)의 주름이 묘사되어 있고 뒷면에는 연화문양이 있는 대(帶)와 여의운문이 양각되어 있는 후수(後綬)를 묘사하였다.
묘소를 둘러싸고 있는 곡장은 좌우 측면만 높게 조성되어 묘역을 보호하고 후면은 3단의 석축으로만 쌓고 뒤쪽에 조성되어 있는 묘역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돌계단을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